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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 대첩

     

    안녕하세요. 여러분들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직장인 블로거입니다. 오늘은 이순신 장군의 역대 업적 중에서 명량 대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명량 대첩을 요약하여 말씀드리면 판옥선 13척으로 왜선 133척과 맞서 싸워 31척의 왜선을 격파했던 대단한 해전이었습니다. 소수의 판옥선이었지만 지형과 지략을 잘 활용한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업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명량 대첩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순신 장군이 겪어야 했던 고난에 대해 스토리 텔링 방식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백의종군

    선조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순신 장군에게 벌을 내리게 됩니다. 2가지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부산의 일본 진영 방화에 대한 논공 사건과 고니시 유키나가 등에 의한 반간계 사건입니다. 결국 선조와 몇몇 신하들 때문에 이순신은 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하고 한양으로 압송,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원래는 처형을 당할 운명이었지만 정탁이나 유성룡, 이억기 등 이순신 장군과 함께 일했던 많은 인사들이 그를 구명하는데 힘을 보태었고 결국 백의종군으로 고문은 끝이 났습니다.

     

    기적을 위한 마음가짐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하고 있는 동안 새로운 수군통제사로 임명받은 원균은 칠천량 전투에서 일본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며 이로 인해 약 160여척의 판옥선이 궤멸당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습니다. 이것은 여러 해 동안 준비한 조선 수군의 전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순신 장군은 진도 벽파정으로 후퇴한 12척의 배를 인수인계받기 위해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조선의 위급함을 알게 된 선조는 이순신을 수군통제사로 재기용하게 되었고 이순신 장군은 10여 척의 배로 수천 척의 적선과 맞설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앙정부에서는 조선 전함의 수가 너무 적어서 적군을 막아낼 수 없으니 수군을 모두 없애고 이순신을 육상으로 합류할 것을 명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으니 사력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막아낼 도리가 있다. 지금 만일 수군을 전폐하면 도리어 적에게는 다행히 되어 호남지방은 물론이요 한강에까지 침범하게 되면 큰일이니 함선이 적을 대로 소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 수군을 쉽게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는 상계를 올리게 됩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이 상계로 중앙정부의 결정을 엎어버리고 수군의 사기를 진흥하기 위하여 함대를 우수영 앞바다에 집결한 뒤 여러 장사를 부르고 군인의 전투신념을 강조합니다. 병법에 말하기를 “결사적 정신으로 싸우면 반드시 살 수가 있고 도리어 살려고만 하면 죽기 쉽다. 그러므로 적어도 한 사람의 남아가 죽을 결심으로 험조에 당하면 1천 부가 무서워한다는 말이 있다. 이 것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장사들은 살 생각만 하지 말고 죽도록 싸우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곧 군법대로 처단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회령포에서 12척의 배를 인수인계받은 이순신 장군은 서쪽으로 천천히 진을 이동시키고 이 과정에서 판옥선 1척을 증강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13척의 판옥선을 가지고 이순신 장군은 130척의 배와 맞서서 싸우겠다는 결정을 하였고 조선의 전력이 많아 보이기 위해 직접 싸우지는 않지만 인근의 어선까지 출동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너지면 저 바다 위의 민간인도 모두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을 수군들에게 은연중 강조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순신 장군은 결사항전을 위한 장소로 명량해협을 선택합니다. 13척의 전선으로 대규모 적을 막을 수 있는 곳, 그곳을 명량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적은 숫자로 많은 적을 막기 위해 좁은 길목을 택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명량해협은 진도와 해남군의 화원반도 사이에 있는 수로로서 길이가 2킬로미터 내외이고 가장 좁은 곳의 폭은 300미터 정도입니다. 이곳의 최저 수심은 1.9미터이고, 조류의 속도는 최대 11.5노트로 매우 빠릅니다. 이곳은 20리 밖에서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울돌목’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얕아 항해가 쉽지 않은 협수로입니다.

     

    명량 대첩

     

    전투를 시작하기 전 이순신장군은 병사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길을 지키면 능히 천 명을 막아낼 수 있느니라.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 것이요. 살기를 작정하고 싸우면 반드시 죽을 것이니라.” 그러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옆을 보니 나머지 조선 함대들은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 버렸습니다. 결국 대장선 한 척만 적군을 맞서 싸워나갔습니다.

     

    당시 왜선은 좁은 해협에서 횡대로 갈 수 없기 때문에 길게 줄을 지어서 가는 종대로 갔습니다. 조선함대를 포위하려고 하는 순간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은 옆으로 돌더니 함포를 총 발사하였고 순식간에 선봉에서 달려들던 일본 전함은 불길에 휩싸여 버렸습니다. 후열의 전함들은 깜짝 놀랐지만 그들의 뒤를 따르는 동료 함선들 때문에 뒤로 물러서고 싶어도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물살이 그들을 조선 함대 쪽으로 밀어주고 있어서 후퇴하기가 물리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진해도 죽고 물러서도 죽게 되었으니 선발 돌격선들은 결사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대장선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군과 싸워나가는 중 깃발을 하나 올렸고 거제 현령 안위가 그 깃발을 보게 됩니다. 그 깃발을 대장선 호위군인 중군장을 부르는 깃발이었고 자신이 중군장은 아니지만 장군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안위는 이순신과 함께 싸우게 되는 도중, 시간이 지나고 갑자기 조류가 바뀌었습니다.

     

    그러자 물살이 바뀌었고 일본군에게 순류이던 물살이 갑자기 역류가 되었습니다. 일본 함대의 선두에 섰다가 파손된 배들이 일본군함대 진영으로 흘러가기 시작하고 배의 잔해와 파편들이 일본군 배에 부딪혔다. 동시에 뒤에 있던 조선 함대들도 일제히 총공격에 나섰고 조선 함대 측에서 치밀한 포격을 통해 적장 마다시(구루지마 미치후사)를 죽이고 뒤를 가득 메우고 있는 일본군 함대 때문에 후퇴하지도 못하는 남은 적선들을 차례대로 물리쳐 나갔습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참패하였고 왜적선 133척 가운데 무려 31척을 깨뜨렸지만 정작 우리 수군은 전체 13척 중 단 한 척도 피해를 입지 않았고 다만 희생자는 34명이었습니다.

     

    힘을 한 곳으로 모으면 불가능은 없다.

    이 전쟁을 통해 깨달은 것은 힘을 집중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의 물길이 좁아서 아무리 적이 많이 몰려온다고 해도 실제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적선은 10여 척 내외로 제한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앞에서만 올 수 있기 때문에 적에게 포위될 이유도 없었고 그렇다면 그곳에만 힘을 집중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공격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배울 점은 이순신 장군의 혁신적인 군사전략입니다. 조류가 바뀌는 시간을 정밀하게 확인해서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갔고 또한 좁은 수로이면서 일본군이 서해로 진출하려면 남해와 서해 중간에 있는 명량해협을 반드시 거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조사해서 무조건 일본군이 이 명량해협으로 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소수의 힘만으로도 치밀한 계획과 힘을 집중한다면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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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이순신 장군의 명량 대첩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숭고한 희생에 대해 다시 한번 숙연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도 더 좋은 정보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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